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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블라블라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by thomasito 202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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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와 볼리비아에서 생각했던 것들

 때는 2012년 군대에 전역하고 학교에 복학을 했을 때다. 이상한 열정에 불타 과 1등을 하여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나는 등록금을 면제받았으니 아버지께 인도에 보내달라고 했다. 내가 존경하는 학과 후배가 인도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듣고, 막연하게 인도에 대한 동경을 키워 왔다. 그렇게 나는 인도에 다녀왔는데 여행하는 내내 학교갈 시간에 길에서 무언가를 팔거나 구걸을 하는 아이들을 볼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항상 마음이 아팠고 그런 광경은 안타깝게도 인도만이 아니었다. 2015년 볼리비아의 흰색 도시로 유명한 수크레에서 광장에 앉아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아이들이 구걸을 하는데 어머니가 저 뒤 먼 발치에서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광장의 벤치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여행을 다니며 정말 울었던 적이 없었는데 유독 그때만큼은 참 눈물이 많이 났다.

 

 나는 하루에 3만원만 쓰는 가난한 여행자였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했지만 그래도 세상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생 때 생각했던 것들

 고등학교 때 나는 참 쓸데없이 생각이 많은 학생이었다. 시키는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학생들은 왜 맞아야 하는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은 도대체 왜 배워야 하는지 도무지 학교에 다니는 이유만큼은 납득을 하지 못했다. 그때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쓸데없이 읽었던 책들 중에 한 권이 체 게바라 평전이었다. 장 코르미에라는 프랑스 평론가 아저씨가 체 게바라에 대한 자료를 모아모아 집필하였다.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로 아르헨티나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천식이 심했고, 공부 머리는 있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그때는 백패커스같은 여행 문화가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선배였던 알베르토와 함께 포데로사라는 오토바이 한 대에 의지하여 아르헨티나를 출발하여 칠레, 페루, 볼리비아를 거쳐 베네수엘라까지 여행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체 게바라는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남미의 보통사람들을 보며 추후 쿠바혁명에 참여하여 혁명의 주역이 된다.

 

 여기까지 였다면 체 게바라는 역사책에 한 줄 정도로 끝날 수 있었지만 좀 특이한 이야기가 있다. 혁명의 대장이었던 피델 카스트로는 사회주의자라기보다 민족주의자에 가까워 그게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누구와 타협해서든 미국과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체 게바라는 순수한 사회주의자였다. 결국 피델 카스트로는 종신집권의 길을 걸었지만, 체 게바라는 쿠바에서 고위직책을 버리고 아프리카 콩고, 남미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혁명을 지속하다가 죽음을 맞는다. 지금 생각하면 좀 현실적이지 못한 사람이라고도 생각이 드는데,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체 게바라의 동기의 순수함에 감명을 받았다.

 

 그 책을 덮고 내가 무어가 될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결심했다. 대학생 때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 마음은 내 깊은 구석에서 계속 남아있었다.

 

직장을 다니며 생각했던 것들

 나는 자본주의의 꽃인 금융회사에 다녔지만 정작 돈에 대한 철학에 대해서는 나만의 노선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라는 객관적으로 동일한 수단을 소유하지만 그것으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천차만별이었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가졌지만 오히려 가지면 가질 수록 내가 이것을 왜 갖고 싶은지에서 멀어지며, 돈 자체를 목적으로 보게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행을 다니고 새로운 경험을 할 때 가장 행복함을 느꼈다. 또 내가 갖지 않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줄 때 너무 좋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이다. 내가 스스로 벌어온 돈이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조차도 내가 여행을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하는 일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직장을 다니며 나의 잔고는 조금씩 쌓여갔지만 예전에 잔고를 쌓을 때만큼 행복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이유를 돌이켜보면 내가 추구하는 것은 돈 자체가 아니고 의미있음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난 여전히 누군가에게 의미를 주고 세상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2017년 크리스마스 이브날이었다. 직장에 들어가고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봉사활동을 했다. 당연히 대부분의 일은 복지관 직원분들이 했고 나는 아주 작은 역할을 맡아 한 분을 전담으로 맡아서 아쿠아리움을 구경하는 일을 했다. 신기하게도 학생 때 했던 봉사활동의 세계와 달리 성인의 봉사활동의 세계에는 정말로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분들이 있었고, 복지의 일선에서 힘쓰시는 분들의 모습도 감명 깊었다. 그래도 아주 조금이라도 매년 기부하고 매년 봉사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체 게바라처럼은 아니더라도 그 마음만큼은 배우고 실천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생각을 계속 잊고 지내면서 살다가 이상하게도 올해 이 생각이 다시 생각났고 근처에서 일손이 필요한 곳에 봉사활동을 신청했다. 마포대교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생명의 전화라는 곳에도 조금이나마 기부했다. 

 

 앞으로 직장생활에서도 대인관계에서도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좋겠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만들어진 나이고 앞으로도 그런 마음이기를 다짐해본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수크레의 어느 광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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