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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블라블라

보고타에서의 하루

by thomasito 2022. 8. 21.

그렇게 오래 전 일은 아니다. 

 

 보고타의 아침은 그 어느 때보다 쌀쌀했다. 중남미의 해발고도가 높은 도시들은 생각보다 월별로 일교차가 그렇게 크지 않아서, 남미의 여름인 1~2월도 여름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중남미 자체가 또 막 난방시설이 필요할 만큼 춥지 않은 데다가, 우리나라와 달리 습기가 많은 겨울이라 아침에 일어나면 되게 으슬으슬했다. 나는 호스텔에서 나무 계단을 내려와 커피를 한 잔 마셨다. 남미에서는 우리나라처럼 그렇게 심각하게 커피를 마시지 않고, 그냥 한 통에다가 커피를 다 우려두고 되게 보리차 마시듯이 마신다.

 

 콜롬비아에서는 슈퍼에서 빵을 팔았다. 참 웃긴 게 슈퍼에서 빵을 팔아도 되는데, 우리나라는 슈퍼에서 봉지빵만 팔다보니까 그런 생각 자체를 잘 못했다. 일반적으로 카운터 뒤에 커다란 나무 장이 있고, 거기에 밋밋한 그러니까 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빵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그것들은 한국의 파리바게뜨에서 파는 빵처럼 반짝반짝 빛나거나 부드럽지 않고 굉장히 투박한 맛이었다. 콜롬비아에서는 항상 그 빵을 먹었다. 사실 그 빵이 맛있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슈퍼 아저씨가 나무 장을 열고 비닐 봉지에 빵을 수북히 담아주는 그 감성이 너무 좋았다.

 

 콜롬비아에서 매일 매일 그 감성있는 빵과 아무렇게나 내린 커피를 마셨다. 

 

 그 날은 내 마지막 여행친구가 떠나는 날이었다. 내가 남미에서 만난 동행들은 그래도 보고타까지는 대부분 올라왔고, 보고타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많은 사람들이 페루 리마에서 여행을 끝낸다는 점을 미루어 볼때 나름 콜롬비아까지 치고 올라오는 사람들은 남미 여행을 굉장히 좋아했던 사람들이다. 내 친구였던 가브리엘라는 순이와 함께 여행 중에 나를 많이 챙겨준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리고 그날 아침은 내 생일이었다. 친구를 다 보내니 마음이 매우 쓸쓸한 날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근처 슈퍼에 가서 내가 좋아했던 과자와 주전부리를 주섬주섬 담았다. 너무나 기쁘게 걸었던 보고타의 구시가지 칸델라리아의 거리에서 그렇게 터벅터벅 소리가 크게 났던 적은 처음이었다.   

 

 가브리엘라는 성경에 나오는 대천사이름이다. 가브리엘라는 그런 이름만큼이나 마음이 참 착했다. 나랑 우쿨렐레를 같이 치던 우쿨렐레 동지이기도 했다. 내가 호스텔의 문을 열었을 때 케익이 있었다. 남미의 케익은 투박한 맛이었고, 케익을 살만한 곳도 별로 없었는데 케익을 본 게 반갑기도 하고 내 생일을 일깨워준 점이 너무 고마웠다. 그렇게 짧은 기쁨을 뒤로 하고 가브리엘라와 너무 인성이 좋으셨던 부부분은 보고타 공항으로 타는 택시에 올랐다.

 

 내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집단에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친한 개별개별의 친구들을 모으면 그 친구들이 학생회 친구들이었다. 나는 학생회도 아니었지만 학생회 친구들과 함께 졸업하는 선배들의 행사를 준비했던 적이 있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015B의 이젠 안녕이라는 노래였다. 나는 그 노래가 졸업식 감성으로 참 좋았다. 끝이자 출발을 의미하는 졸업과 걸맞게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거야.' 라는 가사말이 참 좋았다. 내가 누군가와 작별을 할 때면 그 노래가 생각났다.

 

 택시에 사람들이 타고 나는 우쿨렐레로 이젠 안녕을 불러주었다. 이젠 안녕을 1절만 부르면 되게 짧은 노래인데도 그것보다 시간이 더 빨리 갔다. 만약 우리나라였으면 택시아저씨가 그냥 갔을 수도 있지만, 콜롬비아의 아저씨들도 나름 로맨티스트인지라 그냥 내 노래를 묵묵히 들어주셨다. 그리고 택시가 출발하고, 결국 나 혼자 남았다.

 

 가장 소중한 것을 얻으려면, 가장 아끼는 것을 내어주어야 한다. 가끔은 이 말이 내 머릿 속에 떠오른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중남미 여행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내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을 한국으로 보내야 했다. 나의 마지막 친구까지 한국으로 보냈다. SNS로 한국에 도착한 친구들의 일상이 속속 올라올 때마다 나도 갈 걸 그랬나? 라는 생각을 아주 잠시하기도 했었다.

 

 보고타에는 참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왔는데, 그 날도 비가 왔었다. 그 날은 남미 친구네 놀러 갔다. 아파트 단지 안에 그 친구의 초딩 동생이가 있었는데, 그 친구들과 정신없이 놀았다. 참 여행와서 별일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 딱히 뭘 한 것은 없고 친구랑 놀다가 친구네 아주머니가 퇴근하시고 근처에 피자집에 가서 피자를 먹었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한 지 딱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콜롬비아 친구네서 초딩들이랑 놀고 피자를 먹는 바람에 내 한국친구들이 떠났다는 공허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집에 갈때 아주머니는 언제든 가족처럼 생각하고 다시 놀러오라는 말을 전해주셨다. 나는 당연히 여행자였기 때문에 결국 내 길을 가야했고,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지만 아주머니가 남겨주신 그 한 마디가 마음속에 깊이 남았다. 그렇게 받은 따뜻함들이 모여 모여 내 여행의 온기를 잃지 않도록 도와주셨던 것 같다.

 

 보고타에서 만났던 형형 색색의 사람들 덕분에, 나는 항상 보고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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